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 즉 재판청구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국가 권력을 통해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는 민주 시민의 소중한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모든 권리에는 한계가 있듯이,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인 소권(訴權) 또한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합니다.
최근 사법부의 고심이 깊어지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소권남용(訴權濫용) 문제입니다. 실질적인 권리 구제의 목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심리적 고통을 가하거나 금전적 손실을 입히기 위해, 또는 국가의 사법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로 무분별하게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러한 부당한 소송 행위에 대해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 및 '신의성실의 원칙'을 근거로 엄중히 대응하고 있습니다. 오늘 법률 가이드는 어떤 소송이 소권남용으로 판단되어 각하(却下)되는지, 그 구체적인 사유와 판례의 기준을 면밀히 분석해 드립니다.
1. 소권남용의 개념과 신의성실의 원칙
민사소송법 제1조 제2항은 "당사자와 소송관계인은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소송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소송상의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라 부릅니다. 소권남용은 바로 이 신의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소권남용의 정의
소권남용이란 외견상으로는 소송 요건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송 제도의 본래 목적과 기능에 반하는 방식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겉으로는 "내 권리를 찾아달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을 괴롭히고 싶다"는 부당한 동기가 지배적인 경우입니다.
법원은 이러한 소권남용을 소송 요건의 흠결로 봅니다. 소송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으므로, 법원은 본안 심리(누가 옳은지 판단하는 과정)를 거치지 않고 즉시 소송을 끝내는 각하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2. 대법원이 제시하는 소권남용 판단의 4대 기준
대한민국 대법원은 어떤 경우에 재판청구권의 행사가 남용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소송에서 질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며, 아래와 같은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됩니다.
소권남용 판단 요건
- 정당한 이익의 결여: 소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법률적 이익이 전혀 없거나 극히 미미한 경우.
- 부당한 목적의 존재: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소송 수행을 방해하거나, 부당한 양보를 강요하려는 목적.
- 사법 제도의 오용: 소송 제도를 본래의 권리 구제 수단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행위.
- 사회 통념상 허용 한계 일탈: 권리 행사의 형식만 빌렸을 뿐, 사회 정의 관점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경우.
위 요건 중 특히 '부당한 목적'과 '정당한 이익의 결여'는 소권남용 판정의 핵심입니다. 법원은 원고가 제기한 소송의 내용뿐만 아니라, 원고와 피고의 과거 관계, 소송 제기 전후의 정황 등을 종합하여 판단합니다.
3. 소권남용으로 각하되는 대표적인 사례
실무적으로 법원에서 소권남용으로 인정되어 각하된 구체적인 유형들을 살펴보면 그 판단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동일 소송의 제기
이미 확정 판결이 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승복하지 않고 청구 원인만 살짝 바꿔가며 수십 번씩 동일한 피고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경우입니다. 이는 기판력(확정 판결의 힘)을 무시하는 행위이자 피고의 법적 안정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행위로 소권남용의 전형입니다.
실익 없는 소액 소송의 무차별 제기
단돈 몇 백 원, 몇 천 원의 청구를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그 목적이 권리 회수보다는 피고들을 법원에 출석하게 하여 번거롭게 만드는 데 있는 경우입니다. 법원은 이를 '소송을 수단화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행위'로 규정합니다.
증거 조작 및 허위 주장에 기반한 소송
존재하지 않는 채권을 증거 위조 등을 통해 있는 것처럼 꾸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형사상 소송사기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민사상으로도 소권남용으로서 부적법 각하 대상이 됩니다.
4. 소권남용 주장의 시점과 '본안 전 항변'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소권남용에 해당하는 부당한 소송을 당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때 활용하는 것이 본안 전 항변입니다.
피고는 원고의 청구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본안)를 다투기에 앞서, "이 소송은 소송 요건 자체가 엉망이므로 아예 심리도 하지 말고 각하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할 수 있습니다. 소권남용은 법원의 직권 조사 사항이기도 하지만, 피고가 적극적으로 원고의 소송 제기가 신의칙에 반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소송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데 유리합니다.
법원은 소권남용 여부를 가리기 위해 별도의 기일을 열거나 서면 심리를 강화할 수 있으며, 남용이 명백하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각하 판결을 선고합니다.
5. 소권남용 인정 시 원고가 지는 불이익
소권남용으로 소송이 각하된다는 것은 단순히 "없던 일"이 되는 것 이상의 불이익을 원고에게 초래합니다.
- 소송비용 전액 부담: 각하 판결 시 소송비용은 원칙적으로 원고의 몫입니다. 특히 남용으로 판단된 경우, 피고가 지출한 변호사 보수 등 실질적인 손해에 대해 법원은 엄격하게 원고의 부담액을 산정합니다.
- 손해배상 책임: 부당한 소송 제기로 인해 피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이나 업무 방해 등에 대해 피고는 별도의 불법행위 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습니다.
- 과태료 부과: 민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소권남용이 심각한 경우 법원이 직접 원고에게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는 장치들도 논의되거나 시행되고 있습니다.
6. 사법 신뢰와 재판 효율성을 위한 장치
법원이 소권남용을 엄격히 다루는 이유는 단순히 피고 한 명을 구제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국가의 한정된 자원인 사법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한 명의 소권남용자가 법원을 점거하고 수백 건의 의미 없는 재판을 이끌어간다면, 정말로 절박하게 법의 도움이 필요한 다른 국민들의 재판 기회는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권남용에 대한 각하 처리는 사법 시스템 전체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필터링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실무 대응 핵심 요약 (Checklist)
부당한 소송을 마주했을 때 대응을 위한 핵심 체크리스트입니다.
- 원고의 소송 이력 확인: 상대방이 과거에도 비슷한 소송을 반복했는지 대법원 나의사건검색 등을 통해 확인하십시오.
- 부당한 목적 입증: 소송 제기 전 상대방이 보낸 협박성 문자, "돈 안 주면 계속 고소하겠다"는 등의 발언을 증거로 확보하십시오.
- 법률상 이익의 결여 입증: 이 소송을 통해 원고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피고가 입게 될 피해에 비해 현저히 작다는 점을 강조하십시오.
- 적극적 각하 주장: 본안 답변 전 "소권남용에 의한 각하"를 제1순위 항변으로 제출하십시오.
재판청구권의 무게와 책임
재판청구권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러나 그 보루가 타인을 괴롭히는 무기로 변질될 때 법은 더 이상 그 권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소권남용에 의한 각하 사유는 우리 법체계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마련한 '자정 작용'의 결과물입니다.
부당한 소송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소송의 내용 그 자체보다 소송 제기의 '부당성'과 '신의칙 위반'에 집중하여 방어권을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Law-Post는 법의 보호가 필요한 곳에 올바른 가이드가 닿을 수 있도록, 권리 행사의 정당한 한계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권리는 권리답게 행사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남용되는 권리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