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설계는 단순한 선과 수치의 조합을 넘어, 건축사의 철학적 사유와 기술적 노하우가 집약된 창작물입니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건축주가 설계비를 아끼기 위해 A 건축사에게 받은 기획 도면을 B 시공사에게 전달하여 그대로 시공하게 하거나, 다른 현장에서 사용된 도면을 무단으로 복제하여 사용하는 저작권 침해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Law-Post는 이러한 불법적인 권리 침해에 직면한 건축사와 저작권자들을 위해 법적 대응의 정석을 정리하였습니다. 본 가이드는 법률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며 법률 자료나 서식의 직접 제공 및 대행은 수행하지 않음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1. 건축 설계 도면의 저작물성 인정 요건
모든 설계 도면이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저작권법 제2조 제1호는 저작물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정의합니다. 판례에 따르면, 건축저작물의 경우 기존의 건축법규나 기능적 요구사항을 준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를 넘어, 설계자의 개성이 반영된 '창작적 표현'이 존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전형적인 4베이 구조나 화장실의 표준적 위치 선정 등은 기능적 해결책에 가까워 저작권 보호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반면, 건물의 외관 디자인, 독특한 동선 계획, 공간의 창의적 배치 등이 결합된 도면은 강력한 저작물성을 인정받습니다. 건축물 창작성 판단 기준에 대한 판례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소송의 첫걸음입니다.
2. 저작권 침해의 판단 기준: 의거성과 실질적 유사성
법원이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보는 요소는 의거성과 실질적 유사성입니다. 의거성이란 상대방이 나의 저작물을 보고 베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실질적 유사성이란 두 도면이 사회 통념상 유사하다고 느껴지는 정도를 뜻합니다.
침해 판단의 주요 지표
- 평면도의 구성: 방의 배치, 창호의 위치, 공간의 연계 방식이 원본과 흡사한가?
- 단면 및 입면 디자인: 건물의 높이 산정 방식이나 외장재의 패턴, 특수한 구조적 형태가 반복되는가?
- 수치 및 주석의 일치: 단순한 오타나 특정 설계 사무소만의 고유한 표기법까지 그대로 복제되었는가? (이는 강력한 의거성의 증거가 됩니다.)
특히 최근에는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데이터를 무단으로 유출하여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디지털 데이터의 속성 정보까지 일치한다면 이는 변명의 여지 없는 침해 행위에 해당합니다.
3. 침해 인지 시 즉각적인 조치: 증거 확보와 경고장
자신의 설계안이 도용된 것을 확인했다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냉정한 증거 수집에 착수해야 합니다. 침해 대상 건축물이 이미 착공되었다면 현장 사진, 착공 신고서상의 설계 도면(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확보 가능)을 수집해야 합니다.
증거가 확보되면 변호사나 법무법인을 통해 내용증명(경고장)을 발송합니다. 경고장에는 저작권 침해 사실을 명시하고, 현재 진행 중인 공사의 중단, 도면의 폐기, 그리고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습니다. 내용증명 그 자체로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추후 소송에서 상대방의 '악의성(고의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4. 공사중지가처분: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
건축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이미 건물이 다 지어지는 것'입니다. 건물이 완공된 이후에는 법원이 저작권 보호보다 사회경제적 비용을 고려하여 철거 판결을 내리는 데 매우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사중지가처분 신청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가처분 신청 시 소명 내용
가처분이 인용되기 위해서는 피보전권리(나에게 저작권이 있다는 사실)와 보전의 필요성(지금 중단시키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재판부에 적극적으로 소명해야 합니다. 특히 공정률이 높을수록 보전의 필요성이 낮게 평가될 수 있으므로, 기초 공사 단계에서 신속하게 신청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5.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침해된 가치의 회복
가처분 이후에는 본격적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게 됩니다. 저작권법 제125조에 따르면, 저작권자가 침해 행위로 입은 손해액의 산정은 다음과 같은 방법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상대방이 얻은 이익: 침해자가 해당 도면을 무단 사용하여 아낀 설계비나 공사비 절감액
- 통상적인 실시료: 해당 설계를 정상적으로 계약했을 때 받을 수 있었던 설계 용역비
- 법정 손해배상: 손해액 산정이 어려운 경우 법원이 인정하는 범위(5천만 원 이하) 내에서의 금액
실무적으로는 국토교통부 고시 공공발주 건축설계 대가 산정 기준 등을 참고하여 통상적인 실시료 이상의 금액을 청구하는 전략이 주로 쓰입니다.
6. 저작권법 위반 형사 고소
저작재산권 등을 복제, 배포, 전시의 방법으로 침해한 자는 저작권법 제136조 제1항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형사 고소는 상대방을 압박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다만, 건축물은 형사상 처벌 범위가 다소 좁을 수 있으며 주로 설계 도면 자체를 무단 복제하여 사용한 행위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수사 기관은 건축 도면의 유사성을 판단할 전문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므로, 고소장 제출 시 한국저작권위원회나 관련 학회의 감정 의견서 등을 활용하는 것이 기소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전략입니다.
7. 저작인격권 침해: 성명표시권과 동일성유지권
설계 도면의 무단 사용은 저작재산권뿐만 아니라 저작인격권의 침해이기도 합니다. 건축사가 자신의 이름을 도면에 남길 권리(성명표시권)와 설계의 본질적인 내용이 무단으로 변경되지 않을 권리( 동일성유지권)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원안 설계를 조잡하게 변경하여 시공함으로써 건축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이에 따른 위자료(정신적 손해배상) 청구도 병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재산적 손해배상과는 별개로 산정되며, 침해자의 비도덕성을 강조하는 논거로 활용됩니다.
8. 예방 전략: 계약서와 저작권 등록
분쟁 발생 후의 대응보다 중요한 것이 사전 예방입니다. 설계 계약 체결 시 설계 도면의 저작권 귀속 주체와 용도 외 사용 금지 및 위약벌 조항을 명확히 삽입해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설계안의 경우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저작권 등록을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등록된 저작물은 침해 발생 시 저작자가 누구인지, 언제 창작되었는지에 대한 추정력을 가지므로 소송에서 입증 책임을 현격히 줄여줍니다. 건축 저작물 등록 절차를 미리 숙지하여 자산을 보호하시기 바랍니다.
법률 가이드 제언
설계 도면 저작권 분쟁은 건축 기술과 법리가 고도로 결합된 영역입니다. 단순히 '비슷하다'는 느낌만으로는 승소하기 어렵습니다. 도면의 각 요소가 가지는 창작성을 분석하고, 침해자가 해당 도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경로를 역추적하는 등 치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창의성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Law-Post가 제시한 원칙들을 실무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